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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정치학] Cox et al (2025) 정서적 양극화를 인위적으로 자극하다 (PSRM)

Dr. Julia 2025. 6. 26. 12:38

🧠 “편 가르기 정치”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무너뜨릴까?

칠레 국민투표 사례에서 본 정서적 양극화의 위험

2025년 Political Science Research and Methods에 실린 Cox, Cubillos, Le Foulon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정당에 대한 충성도(당파성)가 약한 나라에서도, ‘우리 vs. 그들’이라는 정치적 감정의 분열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을까?”

이 논문은 바로 이 질문을, 정당 신뢰와 소속감이 극히 낮은 칠레의 2022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실험 현장으로 삼아 탐구합니다.

🔍 연구의 배경: 칠레는 정당정치가 약하다?

많은 정치학 연구들은 “정서적 양극화(affective polarization)”가 강한 정당 정체성, 즉 당파성(partisanship)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대표적으로 Green et al. (2002)은 정당 소속감이 단순한 정책 선호 이상의 **사회적 정체성(social identity)**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정체성이 마치 종교나 민족적 정체성만큼 강력하게 작동하면서, 상대 진영을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처럼 양당제가 뿌리내린 나라에서 정서적 양극화가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Kalmoe and Mason (2022)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일부 유권자들은 상대 진영을 향한 적대감, 증오, 심지어 폭력적 감정까지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 "정당 체계가 약한 나라에서는 어떨까?"
👉 "당파성이 희박한 곳에서도 '우리 대 그들'의 감정이 정치적 양극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바로 이런 의문이 이번 연구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 사례가 **칠레(Chile)**입니다.


📉 정당에 대한 신뢰와 소속감이 사라진 나라, 칠레

칠레는 1990년 민주화 이후 줄곧 **다당제(multiparty system)**를 유지해온 국가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민의 약 70%가 정당에 대한 소속감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이 수치가 10% 이하로 급락했습니다.

  • 2018년의 LAPOP 조사에 따르면, **정당에 소속감을 가진 국민은 10.7%**에 불과합니다. 이는 조사 대상 18개국 중 꼴찌에서 두 번째였습니다 (LAPOP, 2018).
  • 2022년 CEP 조사에서도 정당에 소속감을 가진 비율은 **24%**로 나타났고, 정당 연합에 소속감을 가진 비율은 2017년에 30% 정도에 그쳤습니다 (CEP, 2017; CEP, 2022).

이는 단지 '정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Meléndez and Rovira (2019)는 ‘부정적 당파성(negative partisanship)’이 ‘긍정적 당파성(positive partisanship)’보다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분석합니다. 즉, 어떤 정당을 ‘좋아해서’ 지지한다기보다는, ‘싫어서’ 반대 진영을 거부하는 태도가 더 강하다는 것이죠. 이런 정서는 당연히 강한 정당 정체성을 수반하지 않으며, ‘정당’이라는 조직 자체에 대한 냉소를 키웁니다.


🔀 그렇다면 칠레의 정치적 분열은 어디서 오는가?

칠레 정치에서 흥미로운 점은, 정당이 정체성의 축이 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정치적 양극화가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Cox 외 연구진은 Hobolt et al. (2021)의 브렉시트 연구와 Balcells and Kuo (2023)의 카탈루냐 분리독립 사례를 언급합니다. 두 사례 모두 정당이 아니라 의제(issue) 또는 정치적 쟁점 중심의 정체성이 분열을 만들어낸 경우입니다.

이처럼, 정서적 양극화는 정당 소속이 아니라 특정 이슈나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형성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칠레에서도 2022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당시, 찬반 양측은 단순한 정책 차이를 넘어서 서로를 위협으로 인식하거나 악의적으로 바라보는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 정당도 없고, 종교도 없고, 인물도 없다?

다른 나라들처럼 종교적 균열이나 인물 중심 정치가 정체성의 축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칠레는 종교 기반 정당이나 강력한 정치 지도자 중심의 정당도 부재합니다 (de la Cerda, 2022).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부 학자들(Argote and Visconti, 2024)은 칠레 사회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념적 축이 “군사독재 vs 민주화”라는 역사적 기억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념적 좌우 구분은 여전히 일정 정도 존재하지만, CEP (2022)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31%는 좌우 스펙트럼에서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습니다.

즉, 전통적인 정치 정체성의 기반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정치적 증오’는 살아 있습니다. 이 ‘정치적 증오’가 무엇을 타고 확산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연구의 실험 설계입니다.


결국, 정당 정치가 약하다고 해서 정치적 양극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칠레의 사례는 우리가 알고 있던 “정당 기반 정서적 양극화” 개념을 재정의하도록 만듭니다.
👉 정당이 아니라도, 편 가르기는 가능하다.
👉 당파성이 없어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분열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이 연구가 강조하는 문제의식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을 포함한 다당제 국가들이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경고이기도 합니다.

 

🧪 실험 개요: 정서적 양극화를 인위적으로 자극하다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단연코 정서적 양극화를 실험적으로 “유도”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연구진은 참여자들에게 아주 간단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단기적인 정치적 적대감을 고의로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실제로 낮아졌는지를 관찰했습니다.

실험의 전체 구조는 굉장히 섬세하고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었고, 실험 타이밍도 2022년 칠레 헌법 개정 국민투표 2주 전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시점에 맞춰졌습니다.


🧠 정서 자극을 위한 핵심 장치: “오픈엔디드 프라이머”

이번 실험에서 사용된 핵심 기법은 바로 **Simonovits et al. (2022)**가 고안한 “unobtrusive open-ended priming” 방식이었습니다.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 중 무작위로 절반에게 아주 짧지만 의도적인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바로 이런 식입니다:

당신과 반대 입장을 가진 유권자들(예: ‘찬성’ 또는 ‘반대’ 진영)에 대해 싫어하는 점을 3가지 이상 적어주세요. 이 질문은 헌법 초안 내용이 아닌, 그 유권자들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최소 30초 이상 시간을 들여 작성해 주세요.”

이 질문은 상당히 전략적입니다. 왜냐하면:

  • 참가자 스스로 ‘왜 상대 진영을 싫어하는지’를 곱씹게 만들며
  • 정치적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구체화하고
  • 이에 대한 감정적 반감과 거리감을 활성화시키는 효과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반적인 설문 질문처럼 “당신은 민주주의를 얼마나 지지하십니까?”처럼 무미건조한 문항이 아니라, 감정을 직접 자극하는 심리적 장치였습니다.


🎛️ 대조군 설정: 아무런 정치적 감정이 생기지 않게

그렇다면 실험군에 비해, **통제군(대조군)**은 어떤 질문을 받았을까요?

대조군에게는 정치와 아무 상관없는 홍보전화에 대한 불만을 묻는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받은 홍보 전화 중 싫었던 점을 3가지 이상 적어주세요. 전화 내용이 아닌, ‘전화 자체’에 대한 불만을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해서 실험군과 대조군 모두가 비슷한 형식과 길이의 질문에 답하도록 유도하되, 정치적 감정은 실험군에게만 자극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이 절차를 통해 피로도나 설문 응답시간의 차이 등 외부 요인을 최대한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 실험 설계 요약

항목내용
실험 시점 2022년 8월 (국민투표 2주 전)
조사 방식 온라인 패널 (Netquest / Qualtrics 사용)
표본 설계 성별, 연령, 지역, 교육 수준 등을 고려해 층화표집
전체 응답자 수 약 2,000명
처치 내용 (treatment) 오픈엔디드 프라이머: “상대 진영 유권자에 대한 싫은 점 작성”
통제 내용 (control) 홍보 전화에 대한 불만 작성 (비정치적 자극)
결과 변수 민주주의 지지 수준 (0~10점 척도) 및 정서적 양극화 지수

 

 

⏱️ 실제 반응은 어땠을까?

참가자들이 이 자극 질문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실측 데이터도 제시됩니다.

  • 처치 집단의 평균 응답 시간121초, 대조군은 107초로, 모두 30초 권고를 초과했습니다.
  • 응답 텍스트 평균 단어 수도 비슷하게 15~16단어 수준이었습니다.
  • 응답자의 99% 이상이 질문에 성실히 답변했으며, 빈칸으로 넘긴 사람은 0.67%에 불과했습니다.

즉, 단순히 질문 하나를 던졌을 뿐인데도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상대 진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명확하게 표출한 것입니다.


🎯 그 다음은? 조작 점검과 민주주의 지지 측정

실험 질문 직후,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상대 진영 유권자에 대한 평가’를 0점(매우 부정적)부터 10점(매우 긍정적)까지 점수화하도록 요청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항목들도 측정했습니다:

  • “반대 진영 유권자들은 칠레와 국민에게 위협이 된다
  • “그들은 악한 존재이다”

이러한 감정적 거리감 지표들을 모아 Affective Polarization Index를 구성했고, 이 지수가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조작점검(manipulation check)으로 분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핵심 dependent variable은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민주주의 지지도를 측정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가장 좋은 정부 형태이다”라는 진술에 대해, 0점(전혀 동의하지 않음)부터 10점(전적으로 동의함)까지 점수를 매기도록 함.

 

📊 주요 결과: 잠깐의 자극만으로 민주주의 인식이 흔들린다

연구진의 실험 결과는 한마디로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단지 “상대 진영 유권자에 대해 싫은 점을 써보라”는 한 문장의 프라이밍 질문만으로도, 참가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수준이 유의미하게 감소한 것입니다.


📉 감정만 자극했을 뿐인데, 민주주의 지지가 떨어졌다?

실험 참가자 중에서 약 85%는 국민투표에서 어떤 입장을 선택했는지 명확히 밝힌 유권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결과를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변화가 확인되었습니다.

  • 프라이밍 처치를 받은 그룹은 “민주주의가 가장 바람직한 정치 체제”라는 진술에 대한 동의 수준0.12~0.14 표준편차만큼 감소했습니다.
  • 이 효과는 통계적으로도 유의미하며, 95% 신뢰수준에서 유효한 결과였습니다.
  • 분석 방식(통제 변수 포함 여부, 선호 변수 사전 측정 포함 여부 등)을 바꿔도 효과는 일관되게 나타났습니다.

즉,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이 강화되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약화된다는 인과적 효과가 드러난 것입니다.


⚖️ 이 효과는 단순한 ‘이념적 타협’이 아니다

미국 등 기존 연구에서는 종종, 사람들이 민주주의 규범을 위협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를 **“이념적으로 가까운 후보가 민주주의를 훼손해도 어쩔 수 없다”**는 **전략적 선택(trade-off)**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Druckman et al., 2023).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그런 전략적 고려를 넘어서는,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 정서적 양극화가 강화되면,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 자체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즉, 상대 진영에 대한 분노가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추상적 이상조차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건 매우 심각한 신호입니다.


🧠 감정적 반응을 실제로 측정해봤더니…

연구진은 단지 민주주의 지지만 측정한 것이 아닙니다.
실험 처치가 실제로 정서적 양극화를 유도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감정 기반 지표들을 조작 점검(manipulation check)**으로 측정했습니다.

이 지표들은 다음과 같은 항목들로 구성됐습니다:

  • “찬성(또는 반대) 진영 유권자들은 칠레에 위협이 된다
  • “그들은 악한 존재다
  • “나는 그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이런 문항들에 대한 동의 수준은 처치 집단에서 유의미하게 증가했고, 이를 종합한 **정서적 양극화 지수(Affective Polarization Index)**도 명확하게 상승했습니다.

👉 즉, 연구진이 사용한 간단한 프라이밍 문항이 정서적 적대감 증가 → 민주주의 지지 감소라는 인과 흐름을 성공적으로 포착해낸 셈입니다.


🧩 찬성 유권자, 반대 유권자 모두에서 나타난 효과

또한, 실험 효과는 어느 한쪽 입장에만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헌법 개정 찬성(Apruebo) 유권자든, 반대(Rechazo) 유권자든, 자신과 다른 진영에 대한 감정을 자극받으면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함께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정서적 양극화가 이념의 좌우 구도나 정책 내용에 관계없이 전방위적으로 민주주의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 요약하자면…

  • 단 한 번의 정서 자극만으로도,
  • 정치적 반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이 상승하고,
  • 민주주의라는 체제 자체에 대한 신뢰가 감소했습니다.

이 실험은 단순한 여론 변화가 아니라, 정치적 감정이 제도적 정당성 인식까지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인과적으로 증명한 매우 강력한 결과를 제시합니다.

특히 칠레처럼 정당 중심 정치가 약한 나라에서도, 이런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함의도 큽니다.
정서적 양극화는 특정 체제, 특정 제도, 특정 정당 구조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이 연구는 명확히 보여줍니다.